대한민국 인천채씨의 矜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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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3회 작성일 23-12-13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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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인천채씨의 矜持 불후의 명장 채명신 장군(31세)

 

“나를 장군 묘역에 묻지 말고  파월 장병 사병묘역에 묻어주세요.”불후의 명장 채명신 장군님이 평강채씨로 잘못알고 계신 분이 아주 많습니다. 장군님의 본관은 “인천”으로 31세이십니다. 서울 현충원 서쪽에는 상도문이 있어 저는  그 문을 통해  가끔 현충원을 산책하는데 꼭 장군님 묘소에 들러 참배한 후 산책을 계속합니다. 위치는 서울현충원 정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에 관리사무실과 소공원을 지나면 바로 파월장병묘역이 있는데 큰 도로 바로 옆에 장군님 묘소가 있습니다. 찾기가 아주 쉽습니다. 매일 추모하는 꽃바구니는 새롭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참배하시면 좋겠습니다. 장군님 소개 글을 간단히 올립니다.

 

채명신(蔡命新, 1926년 11월 27일 ~ 2013년 11월 25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외교관·공무원·정치가·체육인·사회기관단체인으로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본관은 인천.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 제5기로 졸업하여 참위(소위)로 임관하여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백골병단을 지휘하였으며, 휴전 후에는 9사단에서 박정희 장군을 만난 이후 5·16 군사 쿠데타에 가담하였다. 5·16 군사 쿠데타 직후 혁명5인위원회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참여했다가, 주월한국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개헌에 반대했다가 예편당했다. 퇴역 후에는 스웨덴, 그리스, 브라질 대사 등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 국군의 주요 지휘관의 한사람이었으며, 베트남 전쟁 당시 맹호부대장 겸 초대 주월한국군 사령부 사령관이었다. 대한태권도협회의 초대 회장이기도 했다. 대한태권도협회의 초대 회장으로 태권도 각 관과 파벌의 통합과 태권도협회 공통 규정을 제정하고 첫 전국승단심사를 조직하였다. 베트남 전쟁 당시 파월 한국군 사령관으로 재임 중 태권도 보급에 노력하였다.

 

‘채명신 장군의 ‘도착 즉시 국립묘지’로’라는 제목 아래 ‘파월전몰장병영령 앞에 눈물을 글썽이며 헌화하는 채명신 장군’이라는 사진설명이 붙었다. 사진 옆 기사에는 ‘20일 귀국한 채명신 주월남 한국군사령관은 이날 청와대로 박 대통령을 방문, 월남전 현황을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중장으로 승진한 채 장군에게 새 계급장을 달아주었다’라고 씌어있다. 당시 채 장군은 청와대로 가기에 앞서 국립묘지(현 서울현충원)를 먼저 방문해 참배했다. ‘죽어서도 월남전 참전 전우들과 함께하겠다’던 채 장군은 오늘 이곳 병사묘역에 묻힌다.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2번 병사묘역. 1033명의 병사가 잠들어 있다. 이 중 971기가 베트남전쟁에서 전사한 병사의 묘다.

 

28일 오후 3시 이곳에 채명신(1926∼2013) 예비역 중장이 묻힌다. 고인은 1965년부터 69년까지 초대 주월(베트남) 한국군사령관을 지냈다. 병사묘역에 예비역 장군이 묻히는 건 건군 사상 최초다. 장군묘역이 있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가지 않고 이곳으로 가는 이유는 25일 별세한 고인의 유지에 따른 것이다.

 

이날 서울 아산병원 빈소에서 만난 부인 문정인(84) 여사는 “평소에도 남편은 입버릇처럼 집(용산구 동부이촌동)에서 한강 건너 동작동을 가리키며 ‘여보, 나 말이야 전우들과 함께 묻혀야겠어’라고 말해 왔다”고 전했다. 유가족들은 비석 뒷면에 ‘나 채명신은 전우를 사랑해 이곳에 묻혔다’는 글귀를 새기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마저 생략하고 담담하게 여백으로 남겨놓는 방안도 논의했다. 고인의 유지에 따라 묘지와 비석 크기는 여느 병사들과 똑같이 만들어진다.

 

서울현충원에 따르면 고인은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2번 묘역 맨 앞 열의 3.3㎡(1평)에 안장된다. 국가보훈처 국립묘지정책과 김흥남 과장은 “고인의 비석(’육군 중장 채명신의 묘’)도 병사들과 똑같이 높이 76㎝, 폭 30㎝, 두께 13㎝의 화강암으로 세워질 예정”이라고 전했다. 장군묘역으로 간다면 26.4㎡(8평)의 묘지 공간을 할당받고 그 위에 봉분을 올릴 수도 있었다. 비석도 병사보다 큰 높이 91㎝, 폭 36㎝, 두께 13㎝짜리다.

병사들 옆에 묻히려 했던 이런 고인의 뜻은 하마터면 받아들여지지 않을 뻔했다.

 

문정인 여사는 채명신 장군이 별세하기 전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가 고인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군인과 군무원의 묘역을 장군묘역·장교묘역·병사묘역으로 구분한 ‘국립묘지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13조)’ 때문에 해법을 찾지 못했다.

 

이에 문 여사는 고인이 별세하기 3일 전인 지난 22일 고인의 뜻을 담은 편지를 써서 청와대에 전달했다. 결국 27일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 문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돌아가신 분의 유지를 따르는 것이 예의라고 박근혜 대통령께서 말씀하셨다”며 병사묘역에 안장하겠다는 뜻을 알려왔다. 고인은 박 대통령의 부친 박정희 소장이 61년 5·16을 일으켰을 때는 5사단장으로 동참했으나 이후 유신체제에는 반대했다.

 

이에 따라 육군은 28일 오전 10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권오성 육군참모총장의 주관(육군장)으로 영결식을 치른다. 국립서울현충원 이순남 주무관은 “동작동의 장군묘역에 355명의 장군이 영면하면서 공간이 남지 않았다”며 “대전의 장군묘역에는 아직도 302기의 여유공간이 있는데도 고인은 전우들의 묘역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고인이 장군에게 주어진 특전을 마다하고 병사들 곁으로 가면서 보여준 ‘전우애’와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적 지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의 실천에 대해 군 안팎에서 반향이 일고 있다. 김지덕 육군본부 인사사령부 중령은 “6·25와 베트남 전쟁의 영웅인 고인이 부하 사랑을 끝까지 솔선수범하면서 후배 장교들에게 큰 귀감이 됐다”고 말했다.

 

신동규(예비역 소령) 재향군인회 부장도 “생전에는 국가와 영토를 지켰고, 죽어서는 국토에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 주겠다는 선배 군인의 결단이 신선한 충격”이라고 했다.

 

신명철 서울남부 보훈지청장은 “채 장군은 마지막까지 참 군인이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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