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002.png 득성(得姓) 및 득본(得本:本貫)의 유래

 

우리나라 성씨(姓氏)는 혈연(血緣)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내려오면서 민족의 역사와 함께 사회적(社會的) 문화적(文化的) 정치적(政治的) 역할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혈맥(血脈)으로 이어져 온 성씨의 전통사상(傳統思想)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조상숭배사상(祖上崇拜思想)을 고취(鼓吹)시키고 인륜도덕(人倫道德)을 중요시하는 문화민족(文化民族)으로서의 긍지(矜持)를 갖게 하였다.

 

성씨(姓氏)의 근원지(根源地)는 문헌(文獻)에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고조선시대(古朝鮮時代)에 왕실(王室)에서부터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혈통(血統)을 중심으로 원시공동사회(原始共同社會)가 형성됨에 따라 통솔에 필요한 기능과 다른 씨족과의 구별을 호칭한 것이 성(姓)으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채씨(蔡氏)의 득성(得姓)에 관하여는 전래(傳來)되는 문헌(文獻)이 부족하여 정확한 고증(考證)이 불가능하고 여러가지 자생설(自生說)이 있으나 신화(神話) 같은 전설로 믿기 어려우며 사성(賜姓)된 기록이 없으므로 통설(通說)과 같이 도래성(渡來姓)으로 봄이 지극히 타당하지만 어느 시기에 어떠한 사유로 우리나라에 와서 정착(定着)하게 되었는지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중국하남성(中國河南省)에 건국(建國)한 채국(蔡國)이 수 백년간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하다가 기원전 477년 주변국(周邊國)의 침공으로 멸망한 후 채씨(蔡氏)들이 여러 국가로 진출하면서 우리나라에도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는 설이 있고.

춘추시대(春秋時代)때 기자(箕子)를 따라 우리나라에 온 채림(蔡琳)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채원광(蔡元光)이 신라 17대 내물왕(서기356~402)의 부마(駙馬)였고 그 후손인 채한보(蔡漢輔․蔡輔漢)가 귀화(歸化)함으로써 그 후손이 우리나라의 채씨(蔡氏)라는 설이 있으나 근년에 이르러서는 우리나라의 채씨(蔡氏)들은 물론이고 주변국가에 거주하는 채씨(蔡氏)들 모두가 한국의 채씨(蔡氏)는 중국하남성(中國河南省)에 뿌리를 둔 채씨라고 굳게 믿고 있다. 이와 같은 현실과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의 채성(蔡姓)은 시기를 알 수 없는 옛날에 중국에서 건너온 도래성(渡來姓)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믿어지나 고거(考據) 할 수 없다. 선인(先人)들께서 수 백년동안 득성(得姓)의 유래(由來)를 밝히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나 현재까지 명확한 근거를 찾지 못하였다.

 

우리 인천채씨(仁川蔡氏)의 관향(貫鄕)은 인천(仁川)인데 인천은 경기도 중서부 경기만에 돌출한 반도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구려의 매소홀현(買召忽縣)이라 칭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경덕왕 때 소성(邵城)으로 개칭 율진군(지금의 시흥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시대(1018년:현종 9년)에는 수주(樹州:지금 부평)에 속하였으며, 숙종때 경원군, 인종때 인주(仁州), 1390년(공양왕2)에 경원부(慶源府)로 계속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392년(태조원년) 인주(仁州)로 개칭. 1413년(태종13)에 인천군(仁川郡)이 되었으며 1460년(세조6)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949년 인천시(仁川市)로 개칭되었다.

 

인천채씨(仁川蔡氏)의 시조는 채선무(蔡先茂)이며 그의 선계(先系)는 문헌(文獻)이 없어 상고(詳考)할 수 없으며 그는 고려때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추증되고 인천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인천을 관향(貫鄕)으로 하게 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및 한국지리지(韓國地理誌) 인천조(仁川條)와 인천시지(仁川市誌)에 의하면 고려조 때 인천지방에 채씨(蔡氏) 이씨(李氏) 하씨(河氏) 문씨(門氏) 공씨(貢氏)등 호족(豪族:그 지방에서 세력이 드센 일족)이 세거(世居)하였다고 되어 있어 인천이 우리 인천채씨(仁川蔡氏)의 세거지(世居地) 임을 입증하고 있다.

 

또 조선조 중종(1506~1544)때 이행(李荇)등이 발간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편 인물란(人物欄)에 의하면 『채보문(蔡寶文)은 고려조 의종 때 이순우(李純祐)의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官職)이 병부시랑(兵部侍郞) 지제고(知制誥)를 지냈으며 보문(寶文)은 동지공(同知公:始祖)의 손자인 금성공(錦城公)의 이름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동지공(同知公:始祖)과 금성공(錦城公) 조손(祖孫)이 인천지방에서 일문(一門)을 번창시키고 세거(世居)하셨음이 한층 명백해 졌으나 득본시기(得本時期)는 기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