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시험 3장을 장원급제하신 조선최고의 천재 채수(蔡壽)선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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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24회 작성일 23-12-13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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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기지(耆之), 호는 나재(懶齋). 채영(蔡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필선 채윤(蔡綸)이고, 아버지는 남양부사 채신보(蔡申保)이다. 어머니는 유승순(柳承順)의 딸이다.

 

▶ 생애 및 활동사항

1468년(세조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469년(예종 1) 식년문과에 장원하여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예문관수찬이 된 뒤, 홍문관교리·지평·이조정랑 등을 역임하면서 『세조실록』·『예종실록』의 편찬에 관계하였다.

1477년 응교가 되어 임사홍(任士洪)의 비행을 탄핵했으며, 승지를 거쳐 대사헌으로 있을 때 폐비 윤씨(廢妃尹氏: 연산군 생모)를 받들어 휼양할 것을 청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벼슬에서 물러났다.

 

1485년 비로소 서용되어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하정사(賀正使)·성절사(聖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대사성 등을 거쳐 호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이후 줄곧 외직을 구하여 무오사화를 피하였다. 1499년(연산군 5) 이후 예조참판·형조참판·평안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갑자사화 때는 앞서 정희대비(貞熹大妃)가 언서(諺書)로 적은 폐비 윤씨의 죄상을 사관(史官)에게 넘겨준 것이 죄가 되어 경상도 단성으로 장배(杖配)되었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여기에 가담,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군되었다. 그 뒤 후배들과 함께 조정에 벼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경상도 함창(咸昌: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에 쾌재정(快哉亭)을 짓고 은거하며 독서와 풍류로 여생을 보냈다. 사람됨이 총명하고 박람강기하여 천하의 서적과 산경(山經)·지지(地誌)·패관소설(稗官小說)에까지 해박하였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시문에는 특히 뛰어나 어려서부터 문예로 이름을 얻을 정도로 당대의 재사였다. 그러나 성격이 경망되고 행동이 거칠고 경솔하여 독실한 유학자는 못 된 데다가, 1511년(중종 6)<설공찬전(薛公贊傳)>이라는 패관소설을 지어 윤회화복을 말하다가 사림의 비난을 받아 불태워지기까지 하였다.

 

김종직(金宗直)에게 종유(從遊)하고, 특히 성현(成俔)과 교제가 깊었다. 사신으로 북경을 내왕하는 길에 요동명사(遼東名士)이던 소규(邵圭)와도 친교를 맺었으나, 당시 새로이 등장하던 사류(士類)와는 잘 화합하지 못하였다. 1703년(숙종 29) 함창의 사림에 의하여 그의 고장에 임호서원(臨湖書院)이 건립되고 표연말(表沿沫)·홍귀달(洪貴達) 등과 함께 제향되었다. 저서로 『나재집』 2권이 있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처자야/ 연밥 줄밥 내 따줄게 내 품 안에 잠자주오/ 잠자기는 어렵잖소 연밥 따기 늦어가오”라는 남녀가 주고받는 농탕한 상주 민요가 있다. 삼한시대에 축조된 그 공갈못이 상주시 공검면에 손바닥만큼 남아 있는데, 곧 복원될 것이라고 한다. 공갈못 근처에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한글 번역 한문소설의 작가인 인천군(仁川君) 채수(蔡壽, 1449~1515)의 무덤과 신도비가 있다. 비신(碑身)을 받치고 있는 두툼한 해태상은 무척이나 이례적인데, 경상북도 문화재 제306호로 지정돼 있다

 

채수가 이 동네에 정착하게 된 것은 공갈못 때문이다. 함창현감이던 아버지를 따라와 살던 책방도령 시절에 공갈못을 구경하러 갔다가 담 너머에 살구를 따먹었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 살구나무 집 딸과 혼인하게 됐다. 훗날 성균관 대사성과 호조참판을 지낸 채수는 중종반정에 본의 아니게 휘말려들어 4등공신이 되지만, 반정이 올바르지 않다고 여겨 처가 동네인 상주시 이안면 이안리에 은거하게 된다. 이안리는 공갈못에서 고개 하나 넘으면 나오는 동네다. 채수, 한문소설 지었다가 파직되기도채수는 이 동네 쾌재정(快哉亭)에서 한문소설 ‘설공찬전’을 지었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보다 40여년 뒤의 작품인데, 1996년에 한글 번역본이 발견돼 화제가 됐다.

 

이 작품은 집필 당대에 한글 번역본까지 나돌았고, 조정에서 금서로 지목해 불사르기도 했다. 또 사헌부가 작가인 채수를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중종이 파직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 곡절까지 있었다. 채수가 머물던 이안리 쾌재정은 지금도 잘 보존돼 있다.

 

채수가 이곳에 은거한 뒤로 그 후손들이 상주, 문경, 예천, 청송, 영양까지 두루 퍼져 살게 되었다. 1913년 대한광복단을 조직하고, 17년 영남 거부 장승원(張承遠,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의 아버지)을 조국 광복에 협조하지 않는다 하여 처단한 항일지사 채기중(蔡基中, 1921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함)이나, 문경군수와 국회의장을 지낸 채문식(蔡汶植) 씨가 모두 채수의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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